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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및 오지

구마노 오지 신사

오지란 무엇일까요?

오지는 참배자를 보호하고 안내하기 위해 구마노 고도를 따라 세워진 구마노 대신사의 부속 신사입니다. 이 신사는 구마노의 “아이 신”을 모시고 있으며 숭배와 휴식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 신사들이 생겨난 것은 역사적으로 참배 안내자로 봉사했던 야마부시 산 수행자들에 기인합니다.

오지 분류

오지는 ‘구주큐 오지’ 또는 ‘구십구 오지’라고 불립니다. 이 수치는 많은 신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확한 수치는 아닙니다.

수많은 오지 신사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다섯 곳을 고타이 오지(후지시로오지, 기리메오지, 이나바네오지, 다키지리오지, 홋신몬오지)라고 합니다.

선별된 오지 신사 목록

다키지리오지

다키지리오지는 구마노 고도 참배길에서 대단히 중요한 곳이며 5대 오지 신사 중 하나입니다. 신성한 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시작되는 곳, 즉 신들의 거처와 불교의 중생 낙원으로 들어서는 입구입니다. 한때 이곳에는 넓은 실내 공간, 목욕탕, 참배자를 위한 숙소, 승려, 여사제, 승려의 거주지가 있었습니다.

구마노 참배의 황금기(12-13세기)에는 이곳에서 참배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 혹독한 냉수 목욕 의식을 반복적으로 거행했습니다. 거행되는 정교한 의식 동안 경전, 기도, 춤, 스모, 시 등이 현지 신과 불교 신에게 바쳐졌습니다.

다키지리오지에서 합류하는 두 개의 강은 신사의 역사적, 정신적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다키지리”는 “폭포의 근원”을 의미하며, 근처에 있는 돈다(이와타) 강과 이시부리 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나타냅니다.

일부 전통에 의하면, 그 중 하나는 산 자의 땅과 죽은 자의 땅을 구분하는 신화 속의 강인 산즈노카와와 관련이 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 초기(1185-1333)의 문서에 따르면, 오지의 오른쪽에 있는 강은 관음보살의 침묵 기도의 영역이고 왼쪽의 강에는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성한 물이 흘렀다고 합니다.

지카쓰유오지

지카쓰유오지는 히키가와 강에 의해 남북으로 양분되어 있는 광활한 산간 분지(표고: 약 300m) 위 다키지리오지와 혼구의 중간 정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오지 신사 중 하나이며 구마노 고도를 따라 세워진 주요 유적지 중 하나입니다.

900여 년 전 구마노를 찾는 황실의 참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이 지역에서는 최대 3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참배하기 전에 강에서 냉수 정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13세기 종교 공예품이 묻힌 유적이 근처에서 발견되었으며 1906년까지 이 장소에는 큰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 건물은 신사를 통폐합하라는 제국의 칙령으로 인해 해체되었습니다.

쓰기자쿠라오지

1109년, 귀족 후지와라 무네타다(1062-1141)는 참배일기에 “길 왼편에 편백나무에 접붙인 벚나무가 있었다.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라고 썼습니다. 이 오지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쓰기자쿠라’는 ‘접붙인 벚나무’라는 뜻입니다.

거대한 일본 삼나무(Cryptomeria)가 많습니다. 어떤 나무는 둘레가 8미터에 800년 이상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나뭇가지들은 모두 남쪽, 나치 폭포와 관음의 후다라쿠 낙원의 힘을 향하고 있습니다. “한방향 삼나무”를 의미하는 “잇포스기”라고 불립니다.

이 신사는 나무와 함께 정부의 신사 통폐합 정책의 일환으로 1906년에 철거될 예정이었습니다. 괴짜이며 천재였던 연구원이자 전위적인 환경 운동가인미나카타 구마구스(1867-1941)에 의해 보존되었습니다. 그는 신사 통폐합이 지역 사람들의 신념 및 신앙과 함께 뛰어난 생물 다양성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맹렬히 반대했습니다.

홋신몬오지

홋신몬오지는 구마노 혼구 다이샤의 신성한 경내로 들어가는 가장 바깥쪽 입구를 의미하는, 구마노 고도 참배길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입니다. 역사적으로 구마노 고도에는 종교 의식 절차의 물리적 표지 역할을 하는 문이 많이 있었으며, 홋신몬오지는 이러한 중요한 영적 표지 중 하나입니다.

“홋신”은 “정신적 각성” 또는 “깨달음에 대한 열망”을 의미하며 “몬”은 “문”을 의미합니다. 이 문을 통과하는 것은 정토 낙원에서 최초의 죽음과 재생을 표지하는 변형된 의식이었습니다.

미즈노미오지

미즈노미오지는 물이 솟아나는 수원이 있는 신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1723년에 기슈번(현재의 와카야마현)의 영주가 이곳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분수 왼쪽에는 작은 돌로 만들어진 지장보살상도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열반에 들어가지 않은 자비로운 존재로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 중 하나입니다. 지장보살은 어린이와 여행자의 구세주이자 보호자이지만 다른 민속 신앙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작은 지장보살은 가운데가 가로로 갈라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균열된 부분에 동전을 넣고 요통이 낫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후시오가미오지

후시오가미오지의 전망대에서 참배자들은 마침내 그들의 목표인 구마노 혼구 다이샤를 처음으로 보게 됩니다. 참배자들은 전통적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는데 이것이 “후시오가미”라는 이름의 유래입니다. 계곡의 가장 낮은 지점에는 1889년 홍수로 무너질 때까지 구마노 혼구 다이샤가 자리했던 신성한 모래톱인 오유노하라가 있습니다. 유물을 인양하여 고지대에 신사를 재건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구마노를 대표하는 이곳 후시오가미오지와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약 1000년 전, 유명한 여성 시인 이즈미 시키부가 참배길에 오른 후 후시오가미오지에서 생리를 시작했습니다. 일본 종교에서 정화는 중요한 요소이며 피는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어 월경 중인 여성은 참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경의를 표할 수 없다는 사실에 몹시 마음이 상하여 괴로워 하면서 시를 지었습니다.

はれやらぬ
みにうきぐものたなびきて
つきのさわりと
なるぞかなしき

하레야라누
미니우키구모노 다나비키테
쓰키노 사와리토
나루조 가나시키

흐린 하늘 아래 나의 몸은
떠도는 구름에 가려지고
불편한 월경이 시작된 것이
그저 서러울 뿐이라

그날 밤 구마노 신이 그녀에게 와서 대답했습니다.

もろともに
ちりにまじわるかみなれば
つきのさわりと
なにかくるしき

모로토모니
지리니 마지와루 가미나레바
쓰키노 사와리토
나니카 구루시키

티끌 있는 신이
어떻게 하여
그대의 월경 때문에
고통스럽겠는가?

신들에게도 모자람이 있기에 구마노는 이곳에서 참배하는 그 어떤 사람도 배척하지 않습니다. 여성이 금지된 일본의 다른 성지와 달리, 구마노에서는 종파, 계층,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환영받았습니다. 개방과 관용은 구마노 신앙의 기본 개념입니다. 전망대에는 이즈미 시키부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유노미네오지

유노미네 온천은 구마노 참배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다이니치고에 경로(1.8km)를 통해 구마노 혼구 다이샤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온천은 치유력과 재생력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유노미네오지는 다양한 역사적 그림과 기록에 등장하며 4월 13일에 열리는 구마노 혼구 다이샤의 봄 축제인 “유노보리 신지”의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아버지와 아들이 고대 의식을 거행한 후 혼구로 가는 참배길을 걷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자신의 어깨에 앉히고 땅에 발이 닿지 않게 합니다.

유노미네오지는 원래 도코지 절 안에 있었으나 1903년 화재 발생 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습니다. 도코지의 숭배 대상은 온천에서 굳어진 광물 퇴적물로 만들어진 거대한 약사여래 “불상”입니다. 유노미네오지는 도코지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온천 숭배라는 자연 숭배와 연관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다른 오지 신사와 구별됩니다.

구마노 참배의 역사

형성

구마노는 선사 시대 이래로 자연 숭배와 관련된 성지로 여겨져 왔습니다. 6세기에 일본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이 지역은 불교 수행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신도와 불교가 혼합되면서 사람들은 구마노를 불교의 정토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9세기와 10세기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지가 형성되었습니다.

제국의 황금시대

11세기는 부처님의 권세가 쇠퇴하고 고난이 세상을 괴롭히던 맛포시대의 시작으로 여겨졌습니다. 천황의 첫 번째 참배 여행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교토에서 황실 가족이 구마노로 참배 여행을 떠나는 일은 거의 100회나 반복되었습니다. 이러한 대규모 참배의 반복으로 신사 건물과 숙박 시설이 차례로 건설되고 개수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요 건물의 기본 규모와 배치가 통합되었습니다. 이 지역을 지원하는 기관들도 형성되었습니다. 구마노 참배자 수는 대단히 많아서 일본의 다른 지역을 훨씬 능가했습니다.

사무라이의 부상

12세기 말에 군인 가문이 부상하고 권세가 봉건 정부에 넘어갔습니다.

13세기 초 고토바 천황은 통치권을 되찾으려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로써 황실의 참배는 끝이 났지만 귀족과 사무라이는 계속해서 참배 여행을 했습니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사무라이들은 지배권을 유지하고 있었고 여러 수준에서 황실과 귀족 사이의 권력 투쟁이 계속되었습니다. 구마노는 제국 수도와의 긴밀한 관계 때문에 고통을 겪었습니다.

15-16세기에 정부 권력이 약화되고 봉건 영주가 권력 다툼을 지속하는 내란과 소요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신사의 재정 기반은 그러한 봉건 영주들에 의해 실질적으로 인수되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이 바뀌어도 구마노의 신사들은 여전히 매우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권력 다툼의 승자는 항상 충실하게 기부를 했습니다.

일반 대중 참배자 증가

15세기에는 생산 능력의 향상과 화폐 경제의 발달로 부유한 시민들도 참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이 시대에 성지를 참배하는 풍습이 사무라이 가문에서 일반 대중에게까지 퍼졌습니다.

구마노 비쿠니 승려는 16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매우 활동적으로 구마노 신앙을 일본 전역에 전파시켰습니다.

17세기부터 19세기 후반에 걸쳐 오늘날의 도쿄인 에도에 강력한 도쿠가와 봉건 정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사무라이 계급의 지배 하에 270년의 평화가 이어졌습니다. 경제 성장과 화폐 체계의 발전으로 도시의 장인과 고소득 상인들은 다른 곳을 방문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도 구마노를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도로와 숙박 시설을 포함한 기타 참배 기반 시설의 건설 및 개선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전개와 도쿠가와 정권의 정치적 안정 하에서 조성된 안전한 여행 환경으로 인해 참배자 수가 증가했습니다.

쇠퇴 및 파괴

19세기 후반에 일본은 강제로 외부 세계에 문호를 개방해야 했습니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과 함께 일본은 봉건 체제의 붕괴와 극적인 변화의 시기를 경험했습니다. 일본은 서구 국가와 경쟁하기 위해 신속히 현대 국가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새 정부는 일본의 종교를 통제하기 위해 엄격한 조치를 취했고 신도와 불교 분리 법령을 발표했습니다. 정부는 또한 신불교 혼합을 금지하고 슈겐도를 전면 금지했습니다. 수천 개의 사원이 파괴되었고 신도와 불교 기관이 통합되어 있던 복합 단지가 강제로 분리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구마노 혼구 다이샤에서는 모든 불교 관련 조각상과 물건이 제거되었습니다.

문화재의 손실은 엄청났고 상당수가 해외로 유출되었습니다. 20세기 초에 일본 정부는 문화보존법을 제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과 그 기간 동안 참배자 수가 극적으로 감소했습니다.

전후 경제 회복기의 목재 수요로 인해 광활한 지역이 임업 개발의 영향을 받았고,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다시 심어졌습니다. 1950년 이후 도로 및 철도와 같은 교통 기반 시설의 발달로 참배 방식이 크게 변화했습니다. 산길의 많은 구간이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풀이 무성해졌습니다.

재발견, 부흥 및 인식

1990년대 후반에는 산 속의 오래된 참배길을 걷는 사람들이 증가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에는 이 지역이 “기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참배객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구마노의 신성한 산들은 현대적인 일본 도시에서 잃어버린 영적 뿌리와 전통적인 시골 생활 방식을 찾는 오늘날의 일본인들에 의해 다시 한 번 재발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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